자유게시판

  • 홈 >
  • 커뮤니티 >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선교사 사역 보고서 송 에스라 2017-11-27
  • 추천 114
  • 댓글 2
  • 조회 410

http://dalrant1004.onmam.com/bbs/bbsView/32/5347956

Ⅱ. 선교 국가 일반현황

1. 국가 소개 :

2. 종교 현황:

3. 정치및문화:

4. 기독교 현황

 

 

Ⅲ. 사역 현장 소개

1. 지역 소개: 흘룡강성, 까이죠우 심양 티엘링, 단동,

2. 기독교 현황

4. 생활환경

5. 문화 수준


    추천

댓글 2

  • 이홍우 2017.11.29 16:08

    중국 소개

    국명 :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1. 정치체제와 국가기구


    중국의 정치체제는 크게 중국공산당, 국가기관, 인민정치협상회의라는 세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1) 중국공산당중국공산당은 1921년 상하이의 한 교외에서 창당되었다. 창당 시기 당원은 57명에 불과했지만, 몇 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국민당과 맞서는 세력으로 급성장하였고,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일당독재의 집권당이 되었다. 1977년 약 3,500만 명이었던 중국공산당 당원은 1997년에는 약 6,900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개혁개방 이래 두 배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중국공산당 당원은 8,8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참고] 중국공산당 직위국가주석 : 중국의 주권을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이다.공산당 총서기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대표하며, 중앙정치국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중앙서기처의 활동을 주재한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라 할 수 있다.국무원 총리 :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부 수반이다. 국가주석의 지명과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동의로 선출된다.

    중국공산당 기구표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이다. 전국대표대회는 5년에 1회 개최되며 중앙위원회가 소집한다. 전국대표대회의 정책 결정은 5년간 중국을 지도하는 주요 지침이 된다. 현재 2,000여 명의 전국대표가 있으며, 2002년에 제16차, 2007년에 제1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고 오는 2012년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후진타오(胡錦濤) 시대를 종료하고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예정이다.
    중앙위원회
    중앙위원회는 전국대표대회 폐회 기간 전국대표대회의 결의를 집행하고 전체적인 당의 업무를 견인하며 대외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대표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결정한 회의로 잘 알려진 제11기 ‘3중전회(三中全會)’는 바로 ‘제3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약칭이다. 당 중앙위원회의 장이 총서기이며, 총서기는 중앙정치국 회의와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고 중앙서기처의 업무를 주재한다.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은 중앙위원회 폐회 기간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하며 전국의 모든 정치 업무를 지도한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국공산당의 핵심으로 중앙조직기구와 최고 지도 기구의 중심이다.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가 열리지 않는 기간 동안 정치국과 더불어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한다.
    중앙서기처
    중국공산당의 일상 업무를 책임지나 정책 결정 기구는 아니며 사무기구이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하에 당헌과 당내 법규를 수호하고 당풍확립, 당 노선, 방침, 정책 및 결의의 집행 상황을 검사 처리하며 당원의 해당, 반당행위 및 당기 위반 등을 조사한다.
    중앙군사위원회
    당이 군을 지배한다는 원칙 하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통수권을 가지 고 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다.


    (2) 국가기관중국의 국가기관은 입법부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행정부에 해당하는 국무원, 사법부에 해당하는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국가 기구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전국 각 성, 시, 자치구 인민대표대회와 인민해방군이 선출한 대표로 구성된다. 헌법 및 형사, 민사, 국가기관과 각종 기본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는 최고 입법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국가주석, 부주석, 국무원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 최고인민법원장, 최고인민 검찰원장을 선출 또는 파면할 수 있는 직권을 가지고 있다. 5년에 1회 개최되며 1년에 한 번씩 연례회의가 열린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전인대 폐회 기간 동안 전인대를 대표하여 직권을 행사하며 헌법 법률의 해석 및 시행 감독과 법률 개정 등이 주된 업무이다. 위원장은 전인대 회의를 주재하고 상무위 회의를 소집한다.
    국무원
    중국의 최고 행정 기관인 중앙 인민정부이다.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상무위원회가 제정한 헌법, 법률 결의를 집행할 의무가 있다. 총리를 정점으로 하여 부총리와 국무위원, 각 부 부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고인민법원
    중국의 최고 사법(재판)기관으로 각 지역의 인민법원이 재판하고 판결하는 것을 관리 감독한다. 국무원과 대등한 관계에 있으며 전인대 직속 기관이다.
    최고인민검찰원
    중국의 최고 사법(검찰)기관으로 각 지역의 인민검찰원이 체포의 승인, 공소제기와 유지 등의 업무를 진행하는 것을 관리 감독한다. 최고인민법원과 마찬가지로 국무원과 대등한 관계에 있으며 전인대 직속 기관이다.


    (3) 인민정치협상회의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 1949 년 9월 중국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의 통일전선 조직으로 설립되었다. 초기 임시 헌법에 해당하는 「정협공동강령(政協共同綱領)」을 제정하는 등 의회 역할을 대행하였다. 제1차 전인대 개최 이전까지 중국 사회주의 운동의 합법성을 상징하는 최고 권력기구였으나 전인대 출범 이후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정책 및 법령을 선전하거나 대외 업무를 협의하는 외곽 조직으로 바뀌었다. 최근 중국의 대외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정협의 대외 활동도 강화되고 있다.[참고] 민주당파(民主黨派)집권당인 공산당을 제외한 8개의 정당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中國國民黨革命委員會),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 중국민주건국회(中國民主建國會), 중국민주촉진회(中國民主促進會), 중국농공민주당(中國農工民主黨), 중국치공당(中國致公黨), 구삼학사(九三學社) 대만민주자치동맹(臺灣民主自治同盟) 등이 있다. 공산당 지도 아래 이들 민주당파들이 합작한 통일전선 조직이 정협이다.(4) 중국의 국기, 국장, 국가국기


     오성홍기(五星紅旗)라고 하며 붉은 바탕에 황색으로 된 큰 별 하나와이를 둘러싼 4개의작은 별로 구성되었다. 가로 세로 비율이 3: 2 인 직사각형이다. 바탕의 붉은 색은 혁명을 나타내며 공산군의 피와 혁명을 상징한다.큰 별은 중국 공산당을, 4개의 작은 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의 4개의 인민계급인 노동자, 농민, 도시 소자산가, 민족자산가 계급을 상징한다. 별이 황금색 인 것은 '추수' 혹은 '광명'을 나타낸다.

    국장국가 휘장은 전체적으로 원형이고, 톈안먼과 다섯 개의 별이 도안의 중심이다. 주위는 곡식 이삭과 톱니바퀴로 되어 있다. 톈안먼은 중국 인민의 혁명 전통을, 다섯 개의 별은 공산당 지도 하에 중국 인민의 대단결을 의미 한다. 톱니와 곡식 이삭은 노동자, 농민 계급을 상징한다.국가중국의 국가(國歌)는 원래 항일 영화 『풍운여아(風雲女兒)』의 주제가였다. 니에얼(聶耳)이 1935년 곡을 짓고 톈한(田漢)이 가사를 만들었다. 1978년 개사를 했으나 1982년 원래의 가사로 복원되었다.

    일어나라! 起來!
    노예 되기 원치 않는 사람들이여! 不願做 奴隸的人們!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을 쌓자! 把我們的血肉, 筑成我們新的長城!
    중화민족은 가장 위험한 시기에 이르러, 中華民族到了最危險的時候,
    사람마다 외치는 최후의 울부짖는 소리 每個人被迫着發出最後的吼聲。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起來! 起來! 起來!
    우리 모두 한마음 되어, 我們萬衆一心,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 冒着敵人的炮火, 前進!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 冒着敵人的炮火, 前進!
    전진! 전진! 전진! 前進! 前進! 前進!



    2. 종교현황
    중국정부에서 인정하는 종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이고 그 외 종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기독교 이단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하게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처리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중국은 종교 청정국가이기도 하다.

    1. 중국의 종교 정책노선
    중국의 헌법 제34조 및 제36조, 민법통칙 제36조, 제37조, 제71조 및 제77조에서는 종교신앙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법에 따른 종교활동의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고,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종교계 인사의 단결 및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당(黨)과 정부의 종교활동에 대한 지도도 강화하고 있다.

    2. 중국의 종교 조직
    중국은 국무원(國務院) 직속기관으로 국가종교사무국(國家宗敎事務局)이 있고 여기에 사무국장(차관급) 1명과 부국장 3명 및 6개국[실(室), 사(司)]을 두어 종교 관련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국가종교사무국 산하에는 종교연구중심(宗敎硏究中心), 「중국종교(中國宗敎)」 잡지사, 종교문화출판사 등을 보유하고 있다.

    3. 중국의 주요 종교활동
    중국은 1994년 1월 31일에 ‘중국 국경 내에서의 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外國人宗敎活動管理規定)’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은 사실상 외국인의 중국 내 선교활동을 제한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같은 날짜의 ‘종교활동 장소 관리조례’ 발표 시행으로 내국인의 종교활동도 제한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94년 4월 13일에 발표한 ‘종교활동 장소 등 규칙’과 1996년 7월 29일에 발표한 ‘종교활동 장소 연도검사(年度檢査)규칙’의 제정으로 종교활동 장소를 법적으로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

    2000년 9월 26일에는 ‘중국 내 외국인의 종교활동에 관한 시행세칙’을 제정함으로써 외국인의 중국 내 종교활동이 중국의 법령을 존중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과 외국인이 중국의 종교사무에 대해 간섭할 수 없다는 점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또한 종교사무조례(국무원령 제426호)를 새로이 제정하여, 2005년 3월 1일에 시행함으로써 중국 내 종교활동을 엄격히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3. 정치 및 문화
    1. 중국의 정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로 존속해왔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4조는 “중국은 공산당의 영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毛澤東]사상, 인민민주주의독재와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궁극적 목표를 무계급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데 두고 이를 위해 과도기적으로 사회주의하의 공산당 일당 독재를 실시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국의 정치는 공산당내에서의 노선을 통한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선시하는 노선과 실용주의 노선간의 갈등의 중심적인 축을 이루어왔다. 정치갈등이나 권력갈등의 양상은 주로 주요한 국가노선이나 정책이 결정되는 전국인민대회를 통해서 드러난다.

    헌법상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은 전국인민대표대회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국가의 대내외 중요사안에 관한 최고의 의결기구이며, 각 지역과 인민해방군에서 선출된 2,900여 명(최고 3,500명)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전국인민대표대회는 1년에 한 차례 정도밖에 열리지 않아 헌법상의 최고권력기관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서방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국인민대표대회는 공산당의 주요정책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며 실질적인 권력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 왜냐 하면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권력자인 국가주석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선거되기 때문이다. 무장력을 통솔하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 역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추천에 의해서 선거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부주석과 군사위원회 위원을 지명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는다.

    국무원은 중앙인민정부라고도 하며 산하 각성(省)과 자치구에 지방인민정부를 두고 있다. 국무원은 중국의 최고 행정기관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된 중요사안을 집행한다. 국무원은 국가행정에 관한 법률의 결의나 결정, 예컨대 국민경제와 사회발전계획, 국가예산 등은 국무원이 집행한다. 국무원은 산하에 29개의 중앙행정부처를 거느리고 있으며, 총리 1명, 부총리 4명, 국무위원 5명, 비서장 1명, 각처 부장 23명(중국인민은행장 포함)을 둔다. 국무원 총리는 국가 주석의 추천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며, 국무원 산하 부총리와 국무위원은 총리의 지명으로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인준을 받아 임명된다.
    2017년 현재 국가주석은 시진핑(習近平)으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도 겸하고 있으며, 총리는 이커창(李克强)이며 이들은 개혁개방세력을 대표한다.

    건국 이후부터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 정치는 두 가지 노선의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었다. 물론 이 대립과 갈등은 공산당 독재와 사회주의 고수라는 범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정치에서 두 가지 노선이란 하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평등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면서 계속 혁명을 추구하고 당의 관료주의화에 반대하며 군중의 힘으로 사회발전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능률을 지향하면서 현대화 또는 과학기술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생산력 증대를 중시하는 노선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노선은 이데올로기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홍(紅)이라고도 하며, 후자는 전문성을 중시한다는 의미에서 전(專)이라고도 한다. 이에 따르면 공산당에 의한 건국후 중국의 현대사는 전자를 중시하는 변혁기와 후자를 중시하는 공고기가 연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76년 다시 등장한 덩샤오핑은 개혁 및 개방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지만 여전히 이와 같은 홍과 전의 갈등은 내재되어 있었다. 즉 개혁 및 개방 정책에 의해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루면서도 여전히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놓고 홍과 전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개혁·개방정책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고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지식인의 자유화운동이 뒤따르게 되면서 의견의 차이는 1989년 6월의 톈안먼[天安門(천안문)]사태로 나타났으며 개혁의 속도를 늦추려는 보수파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4원칙인 당의 영도,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확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정치는 경제적 자유의 확대와 새로운 사회계통의 출현이 가져오는 사회의 다양화에 따라 이에 부합되는 민주적 정치체제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2. 중국의 문화
    전통시대의 중국문화는 공자의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주변국가들에 정치, 철학,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서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와 도교 사상도 인접국가에 전파하고 영향을 주었다. 공산화된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유가사상보다 문예활동을 인민에 봉사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할 것을 방침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창작활동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982년 중국 정부는 문예사상의 ‘견지(堅持)와 발전(發展)’을 주장하고 작가는 4가지 기본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여 작가들의 자유화 경향을 제어하였다. 즉 허용된 자유라는 것은 중국 공산당 체제 내에서의 자유이지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었다.

    1983년 사회주의 사상과 문화의 오염을 막는다는 명분의 정풍운동(整風運動)이 다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바이화[白華]의 ‘오왕금과월오검(吳王金戈越五劍)’, 쉬징짜이[徐敬再]의 ‘굴기적시군(掘起的 試群)’이 비판되었다. 또한 1987년에는 류빈엔[劉賓雁]과 왕뤄왕[王若望]이 비판을 받고 당적을 잃었다. 톈안먼사건 이후에도 일부 작품들이 자산계급(資産階級) 자유화사상에 물들어 있어 당과 사회주의를 불신하고 있다고 비판되었다. 결국 중국의 문예활동은 정치적 면에 종속된 것으로 자유로움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도전이 많아지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에 중국의 화단은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 서구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입하면서 신사실주의(新事實主義), 전위예술 등의 여러 방면으로 모색하고 있다.

    문화혁명 이후 서양음악은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되었다. 모든 음악작품은 공연이 금지되었고 정권이 지정하는 공연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행으로 인민들의 음악생활도 다채롭게 변모하였는데 특히 배우기가 쉽고 이해하기 쉬운 유행음악들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최근에는 가라오케 노래방[歌廳]들이 대도시에 급증하고 있다. 또한 교향악 부문도 1980년대 중반 인민들 사이에 열풍적인 반응을 일으켜 매번 중앙악단의 공연 때 매진되는 일이 흔하였다.
    또한 중국인은 중국 고유의 경극(京劇)을 즐기는데, 이 경극은 극본, 연기, 음악, 노래, 소도구, 분장, 의상 등의 예술적 요소를 다채롭게 결합한 총체적 예술로 사실적이기보다 상징적 원리에 의해 세련화된 예술이다. 이 역시 문화혁명 때에는 소련의 사실주의적 문예정책과 봉건주의적 잔재를 제거한다는 목표로 많은 부분이 변질되었지만 개혁 이후에는 문화혁명기에 금지당한 내용들이 다시 상연되고 표현면에서도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태극권 등 기공수련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 아침에 단체로 기공체조를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스포츠면에서는 육상·체조 등에서도 세계 최고수준의 기량을 나타내고 있다.

    4. 기독교 현황

    1839년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5개 항구가 개방되자, 선교사들은 중국으로 들어와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교회에 대해서 의혹이 상당히 많았으나 톈진조약이 성립된 후에 중국인들의 관념은 점차 변하여 기독교는 결국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교회들 중 장로회는 북방으로까지 교세를 확장했고, 귀정회(歸正會)는 하문에서, 침례회는 영파에서, 메이메이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중국어 음역은 미이미회(美以美會))는 복주에서, 성도회는 톈진에서, 내지회(內地會)는 항주에서, 기독회는 남경에서, 서화회는 하남에서, 신의회는 호북에서, 영미회는 사천에서, 협동회는 섬서에서, 성결회는 산서에서, 존도회는 호남에서, 자리회自理會는 운남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청 말까지 130여 종의 각기 다른 종파가 생겨나 전국으로 확산되어 전도활동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전도사업에 제일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내지회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 중국어 음역은 대덕생(戴德生))였다. 1865년 그는 어떤 종파의 파견이 아닌 자진해서 중국으로 왔다. 그는 중국 옷을 입고 중국 사람과 함께 살면서 각고의 노력 끝에 항주에 교회를 설립했다. 후에 남경, 진강(鎭江), 양주 등지로 확장하여 끝내는 안휘, 호남, 산서, 절강, 몽고, 귀주 등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 범위가 제일 컸다. 이리하여 50년 동안 신도들이 12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의 전도방법은 구전전도 방법 외에도 아동교육에 치중하여 학교와 주일학교를 설립하였다. 일부 교파에서는 번역기관을 설립하여 교의를 선양하는 서적을 저작했고 서양 과학서적을 번역했으며, 상당량의 전도사업에 쓰이는 소품을 발행했다. 또한 이들은 곳곳에 병원을 세워 질병을 치료했고, 구제사업과 기타 고아원과 맹아학교 등 자선기관을 운영했다. 교회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신도 수는 나날이 증가하였다. 청 말까지 통계로 40여 만 명에 이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흥성하던 기독교는 위기를 맞게 된다. 그 원인 중 하나는 기독교와 중국 전통과의 충돌이 빚어낸 결과였고, 다른 하나는 불평등조약에 기인한 것으로 교안(敎案, 근대시기 외래종교와 중국전통의 충돌로 빚어진 일련의 종교사건)발생시 열강의 일방적 이익 때문이었다. 전자는 교회에서 선전하는 교의와 중국 고유의 풍속·습관 사이의 매우 큰 격차에서 비롯되었다. 즉, 교회 측에서 조상숭배·귀신·미신 등을 반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중국 일반사회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완고한 사람들은 기독교가 중국의 예교를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일반사회와 교회 사이에는 상당한 위화감이 조성되었다.

    이에 서양 선교사들을 보는 시각이 의구심으로 가득했고 그들의 거동에 또 다른 의도가 내재해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며, 상당수의 유언비어들이 나돌고 심지어 외국의 정탐꾼들이 라는 말까지 퍼졌다. 실제 불량한 선교사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은 중국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과 국가 내막을 외국에 알려 중국의 국제적 지위에 악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다 과거 전쟁으로 입은 손실로 인한 여파가 사회로 파급되자 원성이 더욱 높아져서 결국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것들을 완전히 교회 탓이라고 돌릴 수는 없지만, 교회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의화단사건은 본래 우직한 충성에 의해 발단된 것으로, 결과적으로 북방 교회는 상당한 탄압을 받았고 선교사와 신도 중 피살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공략하여 청 정부는 항복하고 손해 배상을 해야만 했다.

    또한 당시 기독교와 관련된 교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방관은 선교사 및 그 배후에 대기하고 있는 열강의 개입을 두려워하여 교도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 원세개(袁世凱)는 "교섭사건이 있으면 교민의 고소 혹은 선교사의 한 마디에 의거하여 바로 구속영장을 갖고 사람을 체포한다. 출정한 뒤에도 시비곡직을 가리지 않고 대개 양민을 억압하여 안이한 해결을 도모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의 두 요인은 의화단사건을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고, 기독교는 의화단의 주요 공격의 표적이었다. 이러한 반기독교 정서는 중화민국 성립 후 불평등조약에 관한 문제를 교회의 탓으로 돌리는 여론이 형성됨으로써 또 한 차례 반교 운동이 발생했는데, 이는 의화단사건보다 더욱 거센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수년 동안 반대물결에 휘말려 활동이 거의 정지되었다.

    의화단 사건은 중국 기독교의 선교적인 측면에 하나의 큰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화단사건 발생 이후 기독교 자체에서 성찰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그 결과로 보다 유연한 방식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이는 이전에는 전국 신도의 수가 8만 5천 명에 불과했으나, 이후부터 공산당이 집권하기까지 신도 수가 약 40만 명을 육박하게 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교회당의 보편화를 들 수 있다. 큰 도시에 종파가 다른 교회당이 서너 개 정도는 반드시 있었고 산간벽지나 해변의 작은 마을에도 작은 교회당 하나 정도는 없는 곳이 없었으며, 어디에서나 선교사의 발자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종전에는 이교(異敎)라고 도외시하던 것을 그 당시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렬히 믿은 것을 보면 선교사업이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서양인 선교사에서 현지인 선교사로 대체되어 갔는데, 이는 기독교의 중국 토착화현상의 초보단계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중국에서의 기여는 교육·번역·자선사업·사상 방면에서 두드러졌다.

    처음에 기독교에서 설립한 학교는 그 자격을 신도들의 자제들로 제한했다. 어떤 학교는 전도사업을 담당할 인재와 교회 학교의 교사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 후 교육 자체가 전도사업이며, 전도사업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교회정책의 일환으로 그 대상을 점차 확대하였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전국 교회 학교 중 대학은 16개, 중고등학교 231개, 초등학교 6,812개였고 학생 수는 337,744명에 달했다. 중국 내 다른 학교에서는 중국 고유의 학과에 치중하고 있을 때 이 교회 학교들은 영어·과학 등의 과목을 가르쳤으므로, 이 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중국사회와 정치 방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번역사업은 기독교의 전도방법 중 제일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초기의 번역은 서양인들이 전담하다가 다음 단계로 서양인과 중국인의 합작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결국은 중국인이 전담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번역사업을 담당한 서양 선교사 중 공헌이 큰 사람으로는 앞에서도 언급한 모리슨을 들 수 있다. 그는 『신구약성서』 『한영사전』 『영한문법입문』 『중문법정 中文法程』 『오경사서택요간본 五經四書擇要簡本』 등 모두 그 당시에 실용적인 책들을 만들었다. 모리슨 외에도 미린, 마틴(William A. P. Martin, 1827~1916, 중국어 음역은 정위량(丁韙良)), 네비우스(John L. Nevius), 허드슨 테일러 등이 있었다. 처음에 서양선교사들이 저작한 책들은 모두 중국인이 받아 적은 것이었으나, 이후 점차 중국인들에 의해 저작이 이루어져 갔다. 협화서국(協和書局)의 『도서휘보 圖書彙報』는 그 당시 교회서적을 27종으로 분류했는데 약 2,300여 권에 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교회저작사업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알 수 있다.

    교회의 자선사업으로는 우선 병원의 설립을 들 수 있다. 1836년에 파커(Peter Parker, 1804~1888, 중국어 음역은 피득백가(彼得伯駕))는 광주에 중국 최초의 병원을 세웠다. 1861년에는 북경에도 교회병원이 세워졌고, 의화단사건 이후에는 병원의 설립이 더욱 많아져서 약 400개가 신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양성해 낸 의사의 수도 매우 많았다. 쑨원(孫文) 역시 교회의학 출신의 의사였다. 병원 외에도 고아원, 맹아학교, 양로원, 동서친목회, 천족회, 적십자회 등은 모두 교회에서 발기하여 설립된 것으로서 후에는 차츰 지방인사들과 합작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교의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구제사업이었기 때문에 자선사업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기독교의 전파는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록 중국 전통과의 충돌로 인한 의화단사건과 같은 반기독교운동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 영향은 큰 것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크게는 미신타파, 신윤리사상, 정치혁명, 사회봉사, 동서학술교류의 교량적인 역할 등을 들 수 있고, 작게는 우상숭배, 조상숭배, 귀신숭배, 풍수지리, 점성술, 복점 등등의 전통적 종교사상에 가한 타격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평등사상은 중국 고유의 계급적 윤리관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에서는 효도를 얘기할 때 자식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시에 부모의 책임도 중시한다. 남편과 아내는 평등하고 일부다처를 반대하며 첩들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남녀평등, 혼인자유, 핵가족제도의 제창은 종법(宗法)사회의 기강을 흔들어 놓았다.

    정치혁명은 외형적으로 보면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하나 실제로는 역시 평등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계급타파와 대동세계는 기독교의 근본사상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회문제와 정치문제에서 야기된 운동은 바로 이 평등사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사회봉사는 기독교가 100여 년 동안 추진한 주요사업이었다. 그들은 학교를 세워 가난한 사람을 교육시키고 병원을 세워 질병을 치료해 주는 등 모든 사회공익사업에 최선을 다했고, 일반 선교사들의 하층계급 시민들을 위한 봉사는 일반사회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동서학술교류 측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듯 초기 기독교에서 사용했던 알기 쉬운 문자와 백화성경은 중국문자혁명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고 기독교에서 설립한 학교, 교과목, 서양서적의 번역들은 모두 중국 학술계에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의화단사건 발생 이후 기독교 자체의 성찰에 따른 결과로 기독교와 선교활동이 다시 활기를 찾았으나, 1915년부터 시작된 신문화운동과 함께 서구사상 특히 과학사상이 팽배해져 종교를 신화와 미신으로 치부하는 풍조가 사회에 만연하였다. 또한 각종 열강, 그중에서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고 국공내전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은 혼란기에 빠졌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일본이 물러가고 공산당의 승리로 내전이 끝나 통일된 신중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 자체를 부인하는 공산당에 의한 정부 탄생으로 기독교는 기타 다른 종교와 함께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급기야 1951년에는 서양선교사가 모두 축출되었다.

    1951년 중국공산당은 각급 정부 내에 종교사무부를 설치하고 각 종교 내에 대리인을 선출하여 완전히 통제 가능한 종교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1954)가 결성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어용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이 삼자교회에 등록 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가정교회(家庭敎會)'의 형식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어용적 종교조직을 통해 전국의 종교사원을 조사하여 종교계에 대한 조사와 통제를 완성하였다. 1957년 '대약진운동' 실시로 각 개인들이 동원되어 경제생산에 투입되었는데 목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생산활동에 참가하지 않는 종교는 공개적인 종교활동이 금지되었다. 대약진운동의 정책 아래 정치경제정책의 격렬한 변화로 중국공산당의 종교정책은 소멸정책으로 변하였다. 이에 각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정상적인 종교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종교탄압이 최고조에 달한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각 지역의 홍위병들이 각 교회당에 들어가 건물을 부수고 경전을 태우는 등 성경 읽기·기도·예배활동을 모두 금지시켰다. 이에 중국에서의 공식적인 신앙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억압정책은 개혁개방 정책 결정과 더불어 약화되었다. 1978년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종교정책에 있어서 문화대혁명 이전과 같은 온건노선을 결정하였으며, 제한적으로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전국종교업무좌담회(全國宗敎工作座談會)를 열어 각 종파의 의견을 듣고 건전한 종교업무기구 회복과 종교단체활동을 결정하였다. 이에 각 교회가 재건되었고 종교조직이 회복되었으며 종교학교가 재건되었다. 또한 성직자가 각 교회당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으며 기독교경전이 인쇄·발행되었고, 『천풍 天風』이라는 월간지가 간행되었다.

    1979년 9월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는 활동을 회복하였고, 각 지역의 교회와 하방(下放, 마오쩌둥 시기 간부나 지식인들의 노동을 통한 사상개조를 위해 공장이나 농촌 등지로 보내는 것)시킨 목사를 교회로 복귀시켜 기독교의 소생을 알렸다. 또한 중국공산당은 구예배당을 개방하여 삼자애국교회에 돌려주었다.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는 1980년에 새롭게 수정된 조직장정을 통해 '애국애교'를 강조하였고, "정부의 종교신앙자유정책에 협조하고, 교회의 합법적 권익과 국가안정의 보호를 위해, 사회주의물질문명과 정신문명 건설을 위해, 조국통일 실현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 간 우호적 왕래를 촉진시키고 세계평화를 보호하기 위해 공헌"할 것을 결의하였다.

    가정교회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애국교회가 중국공산당의 종교도구라고 여기고 있어 등록을 거부했으며 삼자교회에 가입하려 하지 않아 종종 지방간부가 신도를 구류·징병·박해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반면에 당국은 가정교회가 해외교회와 연결되어 있어 국제관계를 고려하여 강한 탄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기독교는 개혁개방 이후 급속히 성장했으며, 1992년에는 삼자교회가 6천5백 개의 교회당과 2만 개의 집회장소 및 600만 신자수를 보유하고 있었고, 가정교회는 6천만 신자를 가지고 있었다. 1997년에는 삼자교회가 1천만에서 1천5백만 명, 가정교회가 6천만에서 8천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현재 중국에서 가정교회 성도수는 대략 1억에서 1억 2000만명 정도로 추정하며 삼자교회가 약 30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 이홍우 2017.11.29 11:09

    사역현장 소개

    랴오닝성(遼寧省)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있는 성(省). 성도(省都)는 선양(瀋陽). '요(遼)'라고 약칭한다. 지명은 '랴오허 강(遼河) 유역의 안녕을 바란다'는 의미에서 나왔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는 연(燕)나라에 속했고 진(秦)나라 때는 요동(遼東), 요서(遼西)로 나누어졌고 한(漢)나라 때는 유주(幽州), 당(唐)나라 때는 안동도호부(安東都濠府)와 하북도(河北道)에 속했다. 명(明)나라 때는 요동도지휘사사(寮東都指揮使司)에 속했고 청(淸)나라 때는 이 곳에 성경(盛京)이 설치되었다. 이후 다시 봉천성(奉天省)으로 고쳐졌다가 1928년에 랴오닝 성으로 바뀌었다. 특히 철광석과 석탄이 풍부하며 망간과 마그네슘의 매장량도 많다. 중국 제일의 중공업 지역이며 농기계·식품·제지 공업 등도 발달하였다. 다롄(大蓮)과 잉커우(營口), 단둥(丹東) 등의 항구가 있다.


    1. 선양시(沈陽市)
    선양시는 랴오닝성(遼寧省)의 성도(省都)로서 동북삼성의 상업유통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충지이다. 5천 년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채 변화발전하고 있는 선양은 21세기 중국경제의 발전을 이끌어 갈 중심도시라 할 수 있다.

    1) 행정구역 및 인구
    허핑(和平), 선허(沈河), 따둥(大東), 황구(皇姑), 티에시(鐵西), 둥링(東陵), 위홍(于洪), 쑤자툰(蘇家屯), 선베이신(沈北新)구(区)와 신민(新民) 현급시(縣級市), 랴오중(遼中), 캉핑(康平), 파쿠(法庫)현(縣) 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면적은 13,008㎢이고, 인구는 698만 6천 명(2004년) 이다.

    2) 역사
    선양은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로, 연(燕)나라의 영토였다가 잠시 고구려의 영토가 되기도 했다. 선양이라는 명칭은 원(元) 성종(1296년)때 처음 사용되었으며 1625년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츠(努爾哈赤)가 수도를 랴오양(遼陽)에서 선양으로 옮겼으며 1634년에 청태종(淸太宗) 황태극(皇太極)이 선양을 ‘성징(盛京)’이라 칭하고 청왕조의 국도로 정하였다. 1625년부터 1644년까지 청의 도읍이었으나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 ‘펑톈(奉天)’으로 불렸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장쭤린(張作霖)이 철도, 광산을 근간으로 하여 선양을 근대 공업기지로 발전시켰으나, 1931년 일본이 강점하면서 펑톈시로 불리게 되었다. 항일전쟁에 승리하고 중국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후에 다시 선양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선양이라는 지명은 훈허(渾河)의 원래 이름인 선수이(沈水)의 선(沈)에, 풍수에서 강의 남쪽을 뜻하는 양(陽)으로 ‘훈하의 남쪽’ 이라는 뜻이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난과 일제의 학정을 피해 많은 조선족들이 선양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시타(西塔)를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다. 이곳에는 한국식당, 다방, 옷가게가 즐비하게 서 있어 한국에 온 것으로 착각 할 정도이다.

    3) 기후 및 교통
    온대 계절풍 반습윤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사계절이 뚜렷하고 기후변화가 비교적 크다. 연평균 기온은 7.4℃로 겨울이 길고 상당히 추운 편이며 봄은 갑자기 찾아오고, 일조량과 복사량이 충분하다.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이 내리며 공기가 습하며 가을은 짧고 시원하다. 매년 4-10월은 선양 관광의 최적기이다.

    4) 산업 및 경제
    선양은 상하이, 베이징, 톈진, 광저우 다음가는 중국의 제5대 도시이 최대의 중화학 공업도시이다. 이곳에는 기계공업을 중심으로 야금, 화공, 의약, 건재, 전자, 농업기계, 자동차, 섬유 및 기타 경공업 등 144개 업종의 기업이 있다. 전기, 기계, 금속, 군사공업이 발달하였으며 400여 개의 과학 연구소, 800여 개의 민간 연구소, 28개 의과대학 등 49만 명의 각종 과학기술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선양을 중심으로 배후 위성 도시군이 형성되어 있는데 동쪽에는 석탄도시 푸순(撫順), 남쪽에는 철강도시 안산(鞍山) 및 번시(本溪), 화학섬유도시 랴오양, 서쪽에는 석유화학도시 진저우(錦州), 랴오허, 석탄, 전력도시 푸신(阜新), 북쪽에는 석탄, 식량도시 티에링(鐵嶺) 등이 있고, 항구도시 잉커우(營口)시, 따롄(大連)시가 있어 경제발전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하자원도 풍부하며 다양하다. 철강석(전국 매장량의 22%), 금강석(전국 매장량의 5%), 탄산철강(전국 1위), 옥석(전국 1위), 석탄, 석유, 몰리브덴, 마그네슘, 망간, 소금, 내화점토, 금 등은 매장량이 매우 많다. 토산품으로는 양잠(전국 생산량의 75%), 사과(수출량 전국 1위), 인삼, 녹용 등을 꼽을 수 있다.

    5) 종교 및 기독교 현황
    선양엔 랴오닝성 기독교 양회 소속 삼자교회로 둥꽌교회(東關敎會), 베이시교회(北市敎會), 시타교회(西塔敎會) 등이 있다. 이중 시타교회는 1913년 20명의 신도로 시작하여 성장한 조선족 교회의 모체이다. 동북삼성의 처소교회 지도자를 양육하여 파송하는 사역도 감당하고 있는데, 1894년 개교한 이래 지금까지 동북삼성의 목회자의 산실인 둥베이신학원(東北神學院)이 있다.
    최초의 한글성경을 번역한 장소인 둥꽌교회는 선양의 중심적인 한족교회이다. 1889년 예배를 드리다가 의화단 사건으로 예배당이 소실된 후 1907년 재건축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1941년에 이미 신도 1,300명의 동북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고 문화혁명 이후 1979년에 예배를 재개해 지금은 등록교인 2만 명의 최대 교회이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선양은 동북삼성 기독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들 교회와 신학교가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고, 주변 농촌의 처소교회와 가정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2. 단동시(丹東市)
    옛 이름은 안둥[安東]이었으나, 1965년 개명하였으며, 압록강 하구부의 신의주 대안에 자리하여 신의주와는 철교로 연결된다. 원래 작은 마을이었으나 1907년 개항장이 되었고, 3년 후 일본의 대륙진출 문호로서 발전하였다.

    연평균온도 8.5℃, 연강우량 670~1,200mm이다. 항구는 흘수선(吃水線:배의 물에 잠기는 부분과 잠기지 않는 부분을 가르는 선)이 3m인 배까지 입항이 가능하며, 목재·콩·콩기름 등을 수출한다. 부근 구릉지대에서 생산되는 작잠사를 원료로 하는 견직물공업 외에 제지·비누제조·철 강·기계 공업이 활발하다.

    현재 북중 무역에서 70% 이상이 이곳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 현황
    칠도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회들이 종교활동을 하고 있으나 기독교의 영향력은 미약하다.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중국 여름수련회 송 에스라 2018.05.31 12 190
다음글 선한 이끄심과 선한 행함이 함께 하는 곳 김사비나 2017.06.12 185 336